임대인이 입을 닫아도 계산기는 켜져 있어야 했다 — 전세 피해와 공인중개사의 선순위 보증금 설명의무
경매가 끝나고 배당표를 받았는데 내 이름 옆에 ‘0’이 적혀 있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임대인입니다. 하지만 임대인에게는 남은 재산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때 다시 보게 되는 사람이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공인중개사입니다.
중개사는 보통 이렇게 답합니다. "임대인이 자료를 안 줬고, 그 사실을 확인·설명서에 적었습니다." 2025년 12월 4일, 대법원은 같은 날 선고한 세 판결에서 이 답변이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같은 날 나온 세 판결
세 사건 모두 원심은 중개사가 설명의무를 다했다고 봤고, 대법원은 세 사건 모두 원심을 파기해 다시 심리하라고 돌려보냈습니다.
2024다281297 (다가구, 15가구). 확인·설명서에는 "자료를 요구했으나 임대인이 불응해 받지 못함, 임대인이 구두로 진술한 선순위 보증금 7억"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실제 다른 호실의 선순위 보증금은 9억 5,800만 원이었습니다.
2024다283668 (다가구). 중개사는 임대인이 자료 제출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선순위가 다수 있다'고만 구두로 설명하고 같은 내용을 서면에 적었습니다.
2024다305087 (다세대, 공동근저당). 중개 대상 호실만 확인하고, 공동저당으로 묶인 다른 세대의 권리관계와 임차인 보증금은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대법원의 메시지는 하나입니다. '자료를 못 받았다'는 사실은 설명의무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막연히 '선순위가 많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위험의 규모를 구체적으로 알려야 합니다.
자료가 없어도 할 수 있었던 계산
임대인이 다른 임차인의 계약 내역을 보여주지 않아도, 중개사가 볼 수 있는 것은 있습니다. 건물 규모, 전체 세대 수, 주변 보증금 시세입니다. 대법원은 이 정도면 선순위 보증금이 대략 얼마나 될지 추정할 수 있고, 그 결과를 성실히 설명해야 한다고 봤습니다.
2024다281297 사건의 숫자로 계산해 보면 이렇습니다. 건물은 10억 5,000만 원에 매각됐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앞서 근저당권(채권최고액 7억 200만 원)과 다른 호실의 보증금 합계 9억 5,800만 원이 줄을 서 있었습니다. 앞줄만 16억 원이 넘으니, 보증금 6,500만 원짜리 임차인에게 돌아올 몫은 없었습니다. 실제로 이 임차인은 한 푼도 배당받지 못했습니다.
세대 수와 시세만 곱해 봤어도 '임대인이 말한 7억'이 맞는지 의심할 수 있었다는 것이 이 판결의 요지입니다.
어디까지 들여다봤어야 하나
다가구주택은 건물 전체가 하나의 등기입니다. 그래서 다른 호실 임차인의 보증금이 모두 내 앞줄에 설 수 있습니다. 소액임차인의 최우선변제 가능성도 함께 봐야 합니다.
다세대주택은 호실마다 등기가 따로 있어서, 원칙적으로는 해당 호실의 권리관계를 보면 됩니다. 그런데 임대인 소유의 여러 세대에 하나의 근저당권이 공동으로 설정되어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대법원은 이 경우 공동저당이 설정된 다른 세대의 등기부상 선순위권리와, 그 세대 임차인의 보증금 및 임대차 시기·종기까지 확인해 설명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2024다305087). 다른 세대가 경매되면 그 배당 결과가 내 호실에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2024년 7월 10일부터는 공인중개사법 시행령·시행규칙이 바뀌어 확인·설명 항목이 더 늘었습니다. 임대인의 국세·지방세 체납 정보, 확정일자 부여현황, 전입세대확인서를 바탕으로 한 선순위 권리관계와 최우선변제 가능한 소액임차인의 범위 등이 추가됐습니다. 위 세 판결은 그 이전의 계약을 다룬 것이니, 지금 맺는 계약이라면 중개사가 확인해야 할 범위는 그보다 넓습니다.
가상 장면: '그 호실'만 보면 안전해 보였다
아래는 설명을 위해 만든 가상의 예입니다.
임차인 F는 20세대 다세대주택의 한 호실을 보증금 1억 원에 계약했습니다. 등기부상 그 호실에는 채권최고액 1억 2,000만 원의 근저당 하나뿐이었고, 중개사는 "시세 대비 안전한 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그 근저당은 같은 임대인 소유 12세대에 공동으로 설정된 것이었고, 다른 세대에는 이미 전입한 임차인들의 보증금이 쌓여 있었습니다.
이 경우 F가 따져볼 질문은 하나입니다. 중개사가 공동저당이라는 사실, 그리고 묶인 다른 세대의 임대차 현황을 확인하고 설명했는가. 확인·설명서에 그 흔적이 없다면, 2024다305087 판결이 말한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다퉈볼 여지가 생깁니다.
누구에게, 얼마까지, 언제까지
누구에게. 설명의무를 어긴 개업공인중개사는 공인중개사법 제30조에 따라 손해배상책임을 집니다. 현장을 안내하거나 설명한 사람이 중개보조원이나 소속공인중개사였어도, 그 업무상 행위는 고용한 개업공인중개사의 행위로 봅니다(제15조 제2항). 중개사 개인에게 재산이 없더라도, 중개사가 가입한 공제계약에 따라 한국공인중개사협회 등 공제사업자에게 공제금을 청구할 수 있습니다. 위 세 판결도 모두 공제금 청구 사건이었습니다.
얼마까지. 여기서 놓치기 쉬운 점이 있습니다. 공제 한도는 개인 개업공인중개사 연 2억 원, 법인 연 4억 원입니다(2023. 1. 1. 시행). 그런데 이 한도는 계약 한 건당이 아니라 그 사무소의 1년간 사고 전체에 대한 총액입니다. 같은 사무소가 한 건물에서 여러 세대를 중개했다면 피해자들이 한도를 나눠 가져야 합니다. 한도를 넘는 부분은 중개사 개인에게 청구해야 합니다.
또한 임차인에게도 스스로 확인할 책임이 있다고 보아, 과실상계로 배상액이 줄어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줄어드는 비율은 사건마다 다릅니다.
언제까지. 손해와 가해자를 안 날부터 3년, 불법행위가 있은 날부터 10년이 지나면 청구할 수 없습니다. 배당이 끝났다면 이미 시간이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모아 둘 서류
중개대상물 확인·설명서: '실제 권리관계 또는 공시되지 않은 물건의 권리 사항'란에 무엇이 적혀 있는지가 출발점입니다.
배당표와 매각 결과: 내 앞에 누가 얼마를 받아갔는지가 손해액과 인과관계를 보여줍니다.
공제증서: 계약 때 받은 공제증서에서 공제사업자, 공제기간, 한도를 확인합니다.
계약 당시 등기부와 건물 현황: 세대 수, 공동저당 여부를 계약 시점 기준으로 다시 확인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계약이 2024년 7월 이전이라 강화된 시행령이 적용되지 않는데도 청구할 수 있나요?
가능성이 있습니다. 2025년 12월의 세 판결은 모두 2024년 개정 이전의 계약을 다뤘습니다. 대법원은 당시 법령으로도 다른 임차인의 보증금 자료를 요구하고, 받지 못하면 규모를 조사해 설명할 의무가 있었다고 봤습니다.
Q. 같은 건물 피해자가 많아서 공제 한도가 이미 다 찼다면요?
공제 한도는 공제사업자가 지급하는 금액의 상한일 뿐, 중개사 본인의 책임 한도가 아닙니다. 한도를 넘는 손해는 개업공인중개사 개인을 상대로 청구할 수 있습니다. 다만 개인의 재산 상황에 따라 실제 회수 가능성이 달라지므로, 소송 전에 재산 보전 조치를 함께 검토하는 것이 좋습니다.
마치며
"임대인이 안 알려줬다"는 말은 중개사의 면책 사유가 아니라, 중개사가 계산기를 켜야 했던 이유입니다. 배당에서 보증금을 잃었다면 임대인만 바라보지 말고 확인·설명서와 공제증서부터 꺼내 보시기 바랍니다. 공제 한도가 연간 총액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검토는 빠를수록 좋습니다.
이 글은 일반적인 정보 제공을 위한 것이며, 개별 사건에 대한 법률 자문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