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차권등기부터 풀어달라는 집주인 — 보증금보다 말소가 먼저일 수 없는 이유와 안전한 순서
보증금을 못 받아 임차권등기까지 마쳤는데, 집주인에게서 연락이 옵니다. "등기 때문에 새 세입자가 안 들어와요. 등기부터 풀어주시면 새 보증금 받아서 바로 드릴게요."
사정만 들으면 그럴듯합니다. 하지만 이 제안을 받아들이기 전에 세 가지를 따져봐야 합니다. 법이 정한 순서가 무엇인지, 집주인이 왜 그 순서를 바꾸려 하는지, 그리고 꼭 풀어줘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안전한지입니다.
보증금이 먼저, 등기 말소는 그다음
법원의 임차권등기명령으로 마친 등기는, 임대차가 끝났는데도 집주인이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는 상태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대법원은 집주인의 보증금 반환의무가 임차인의 등기 말소의무보다 먼저 이행돼야 하고, 둘은 동시이행 관계가 아니라고 봤습니다(대법원 2005. 6. 9. 선고 2005다4529 판결). 집주인은 "등기부터 말소하라"며 보증금 반환을 미룰 수 없습니다.
다만 모든 임차권등기가 같지는 않습니다. 법원 명령이 아니라 집주인의 협력을 받아 민법 제621조에 따라 한 임차권등기라면, 다른 약정이 없는 한 보증금 반환과 등기 말소가 동시이행 관계입니다(대법원 2024. 12. 12. 선고 2024다261989 판결). 이 경우 임차인이 말소에 필요한 서류를 준비해 제공하지 않으면 집주인을 지체에 빠뜨리지 못해 지연이자를 청구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협상에 앞서 등기부에서 내 등기가 어느 쪽인지부터 확인하세요.
집주인이 서두르는 이유, 임차인이 잃는 것
집주인이 말소를 재촉하는 데에는 법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임차권등기명령에 따른 등기가 끝난 주택에 그 뒤 들어온 임차인은 소액임차인 최우선변제를 받을 수 없습니다(주택임대차보호법 제3조의3 제6항). 새 임차인 입장에서는 위험한 집이 되니 계약을 꺼리고, 전세자금대출이나 보증보험 심사에서도 걸림돌이 됩니다.
반대로 임차인이 먼저 말소해 주면 잃는 것이 많습니다. 이미 이사했다면 임차권등기가 지켜주던 대항력과 우선변제권이 사라집니다. 그 사이 집에 가압류나 근저당이 새로 들어오면 그보다 앞선 순위를 되찾기 어렵습니다. 남는 수단은 보증금 반환 소송인데, 판결을 받는 것과 실제로 돈을 받아내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공증을 받은 지급 약정서도 등기를 대신하지는 못합니다. 공정증서는 소송 없이 강제집행에 들어갈 수 있게 해 줄 뿐, 경매에서 앞 순위로 배당받을 자리를 지켜주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꼭 풀어야 한다면, 같은 날 같은 자리에서
새 임차인의 보증금으로 돌려받는 것이 현실적인 유일한 방법일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먼저 말소, 나중에 지급'이 아니라 돈과 서류가 같은 순간에 오가는 구조를 만들어야 합니다.
3자 합의서를 씁니다. 집주인, 기존 임차인, 새 임차인이 함께 서명하고, 새 보증금 중 반환할 돈을 기존 임차인 계좌로 직접 보낸다고 정합니다.
잔금일에 한자리에 모입니다. 중개사나 법무사가 함께하면 좋고, 그날 등기부를 다시 떼어 새로 들어온 권리가 없는지 확인합니다.
전액이 들어왔는지 확인합니다. 일부만 들어왔다면 등기는 그대로 둡니다. "나머지는 다음 달에"라는 말에 말소를 내주면 처음 제안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확인한 그 자리에서 말소 서류를 넘깁니다. 서류만 건네고 끝내지 말고, 말소 접수까지 확인합니다.
등기가 '찍힌 것'을 보고 이사하세요
말소 문제와 짝을 이루는 것이 이사 시점입니다. 대항력은 점유와 주민등록이 유지되는 동안만 이어집니다. 2025년 대법원 사건에서는 보증보험사가 임차인을 대신해 임차권등기명령을 신청했지만, 등기가 마쳐지기 전에 임차인이 이사했습니다. 대법원은 대항력이 이사 때 소멸했고, 나중에 등기가 마쳐져도 소급해 회복되지 않으며 등기 시점부터 새로운 대항력이 생길 뿐이라고 판단했습니다(대법원 2025. 4. 15. 선고 2024다326398 판결). 그 사이 근저당이 있었다면 순위가 밀립니다.
2023년 7월 19일부터는 임대인에게 송달되지 않아도 임차권등기를 할 수 있게 되어 등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줄었습니다. 그래도 기준은 '신청'이나 '결정'이 아니라 등기부 을구에 주택임차권이 기재된 것입니다. 이를 확인한 뒤에 이사하세요.
등기명령 신청과 등기에 든 비용은 임대인에게 청구할 수 있습니다(제3조의3 제8항). 대법원은 이 비용을 민사소송으로 청구하거나 상계에 쓰는 방법도 허용했습니다(대법원 2025. 4. 24. 선고 2024다221455 판결).
자주 묻는 질문
Q. 보증금 일부를 받았는데, 그만큼 등기를 풀어 달라고 합니다.
남은 돈이 있다면 등기는 유지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등기가 담보하는 것은 받지 못한 보증금 전체이고, 일부만 받은 상태에서 말소하면 남은 금액을 지킬 장치가 사라집니다. 일부 수령 사실은 영수증이나 이체 내역으로 남겨 두면 나중에 정산할 때 다툼을 줄일 수 있습니다.
Q. 이미 말소해 줬는데 돈이 안 들어옵니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은요?
아직 그 집에 살고 주민등록도 그대로라면 대항력은 유지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이미 이사했다면 보증금이 여전히 반환되지 않은 상태이므로 임차권등기명령을 다시 신청하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습니다. 다만 2024다326398 판결의 논리에 따르면 새 등기는 그 시점부터의 순위만 가집니다. 그 사이 들어온 권리보다 뒤로 밀릴 수 있으니, 집주인 재산에 대한 가압류와 반환 소송을 함께 서두르는 것이 좋습니다.
마치며
"등기 풀어주면 줄게요"라는 제안에 답하기 전에, 법이 정한 순서는 보증금이 먼저라는 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새 임차인의 돈으로 정리해야 하는 사정이 있다면, 순서를 바꾸지 말고 같은 날 같은 자리에서 돈과 서류를 맞바꾸는 구조를 만드세요. 내 등기가 어떤 종류인지, 지금 등기부에 무엇이 새로 들어왔는지부터 확인하는 것이 출발점입니다.
이 글은 일반적인 정보 제공을 위한 것이며, 개별 사건에 대한 법률 자문이 아닙니다.